[종교 칼럼] 이정기 목사, "누구 앞에 서 있는가?" |
이정기 목사(신나는교회) |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라는 유명한 가사의 가요가 있다. 나에 대한 자의식은 언제나 '너'라는 그대가 있어야 생기는 법이다. 그런데 작아지는 나는 항상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태산 같은 문제 앞에서 한 없이 작아지는 나는 절망적이지만, 바다 같은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작아지는 나는 오히려 행복한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작아지게 만드는 나의 '너', 나의 '그대'는 과연 누구냐는 것이다. 여러분에게 그대는 누구인가? 하나님 앞에만 서면 정말 작아지는 나를 발견하는 것이 축복이다. 그러면 교만해 질 수 없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복이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복이다.
사람에게는 세 가지의 본능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소유욕이다. 가능한 한 많이 가지고 싶어하는 욕심이다. 두 번째는 되고 싶어하는 본능이다. 정치적인 욕망이 여기에 속한다. 세 번째는 보이고 싶어하는 본능이다. 인정받고, 칭찬받고, 존경 받고 싶어 보이고 싶어한다. 우리는 이 세가지를 조심하지 않으면 시험에 빠지게 된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기 때문이다. 기억하자. 하나님은 다 아신다. 다 보고 계신다. 마태복음 6장에 예수님께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셨다. 외식하는 자와 같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고, 금식하고, 구제하면 이미 자기상을 다 받은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은밀하게 하면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이 갚으신다고 하셨다.
우리는 강도 만난 자의 참된 이웃이 되어준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를 잘 알고 있다. 만약 그 사건이 여리고로 내려가는 후미진 골짜기가 아니라, 예루살렘 거리 한 복판에서 일어났다면 어떠했을까?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냥 지나갔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선을 행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만 선을 행하면 사람들 앞에 서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보든 안보든 선을 행하고 있다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요즘 가장 곤욕을 치르고 있는 사람은 박찬주 육군대장 부부일 것이다. 그들이 장로 부부라는 것이 얼굴을 화끈하게 한다. 창피해 죽겠다. 아니 이해할 수가 없다. 조금이라도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갑질을 할 수 는 없는 것이다. 무늬만 그리스도인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고넬료가 베드로를 초청한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들어서자 고넬료가 발 앞에 엎드려 절한다. 고넬료는 누구인가? 로마의 백부장이다. 장교이다. 베드로는 누구인가? 일개 식민지 국가의 어부였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고넬료가 베드로 앞에서 그런 경의를 표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그런데 그렇게 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때 베드로가 일으켜 세우면서 말한다. '일어나시오. 나도 사람이요.' 그때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행10:33절을 함께 읽어보자.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이것이 고넬료의 신앙이었다. 하나님께서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주셨다.
다윗은 왕이 된 후에 어떻게 하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다시 모셔올 수 있을까를 노심초사했다. 블레셋에 빼앗겼다가 국경에 방치되어 있는 언약궤를 그냥 둘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다윗의 명령으로 언약궤를 옮기다가 그만 웃사가 죽고 만다. 하나님의 방법대로 운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약궤 옮기는 것을 중단하고 언약궤는 오벧에돔의 집에 3개월을 있게 된다. 오벧에돔이 복을 받자 다윗이 용기를 내어 다시 시도한다. 이번에는 하나님의 방법대로 고핫 자손들이 어깨에 매고 옮긴다. 언약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오자 다윗은 너무 기뻐 뛰놀며 춤을 추었다. 얼마나 열정적으로 춤을 추었던지 몸이 드러나도록 추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다윗의 아내 미갈이 체면을 구기고 품위를 잃었다고 왕을 비난한다. 그때 다윗이 이렇게 말한다.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삼하6:21) 다윗은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았다. 체면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바라보았다. 하나님 앞에서 행동했다.
그러나 사울왕은 달랐다. 사울은 준수한 외모와 뛰어난 능력을 지닌 왕이었다. 그런 그가 '사울이 죽인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고 외치는 백성들의 소리에 맛이 간다. 그날 후로 사울왕은 다윗을 주목한다. 하나님을 주목하고 하나님을 의식해야 할 사람이 인기나 백성들의 평판에 신경을 쓰고, 다윗을 의식하였기에 올바른 생각과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는 것 보다 하나님에게 잘 보이는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보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느냐 이다. 우리는 누구 앞에 서 있는가? 영적인 지도자와 하나님의 백성들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서 있어야 한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며, 공동체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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