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 칼럼] 삼일운동과 기독교 |
이상규 교수(고신대학교) |
삼일운동’은 근대 한국역사상 최대의 민족운동이자 독립운동이었고, 한국교회사에도 커다란 변화를 주었다. 삼일운동을 통해 기독교는 그간의 2가지 오해를 불식시키는 계기가 됐다. 첫째, 기독교는 무군(無君) 무부(無父)의 종교요, 멸기난상(滅紀亂常)의 종교라는 것이고, 둘째로 외래종교요 서양종교로서 한국인의 신앙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인식이 강했다. 그러나 삼일운동을 통해 민족의 현실에 무관심하지 않는 기독교의 모습을 보고 그 오해를 해소하는 계기가 됐다.
삼일운동이란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고 9년 후에 일어난 사건으로서 민족독립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과 소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당시 약 2개월에 걸쳐 200만이 넘는 한국인이 삼일운동에 가담했다. 3월 1일에서 5월말까지 학살된 사람이 7,979명, 부상자가 1만 5,961명, 검거된 사람이 4만 6,948명에 달했다. 이것은 일제가 만든 통계로 실제는 이보다 더 많은 희생자가 있었을 것이다.
삼일운동의 영향과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그해 4월 11일 상해(上海)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됨으로 국민주권정부 수립운동이 일어나고 거족적인 민족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형성됐다.
둘째, 비폭력 삼일운동으로 많은 피해를 입게 된 것을 교훈 삼아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무장독립 투쟁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셋째, 삼일운동에 참여했던 민중들의 정치의식이 고조돼 국내 민족운동 기반이 강해졌고 국산품애용, 근검, 절재운동, 계몽운동 등으로 발전했다.
넷째, 삼일운동이 당시의 민족 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세계의 피 압박 약소국가의 독립과 해방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다섯째, 삼일운동은 일제의 식민통치수단인 무단정치의 한계를 깨닫게 해 문화정치로 전환되는 계기가 형성된 것이다.
삼일운동 당시 한국의 인구는 약 2,000만으로 추산되며, 기독교인은 약 20만 명으로 추산된다. 삼일 독립운동에 가담한 인구가 200만 명이었으므로 전체 인구의 10%가 삼일운동에 가담한 것이다.
기독교신자는 전체 인구의 1%에 지나지 않았으나, 기독교가 삼일운동에서 25~30%의 역할을 감당했다. 중국 공산당 운동의 아버지로 불리는 진독수(陳獨秀)는 삼일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의 역할을 알게 된 후 종교를 미신이라고 생각하던 기존의 입장을 버리고, “우리는 조선의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았다는 사실을 볼 때 기독교를 경시하던 사상을 고쳐야 한다”라고 말했다. 한국기독교는 민족의 고난의 현장에서 민족과 함께하는 고난 받는 교회였다. 이 전통을 극적으로 보여 준 사건이 삼일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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